1977년 3월 25일, 인사동 남강의 일곱 사람 — 그리고 1977.3.26 덕수빌딩 창립총회 61명

영가회의 가장 첫 결 — 인사동 남강 다실에서 시작된 한 자리

2026年 05月 10日글 · 편집실

편집실 안내 — 이 글은 영가회의 가장 첫 자리 — 1977년 3월 25일 인사동 남강(南崗) 다실의 일곱 분1977년 3월 26일 덕수빌딩 창립총회의 61명 참석자 — 두 호흡을 한 글에 정리한 자리입니다. 1대 김해길 회장 평전(/archive/saram/1dae-kim-haegil) 과 모임 챕터의 〈1977.3.25 영가회 창립총회 — 인사동 남강에서〉(/archive/moim/1977-changrip-chongdae) 와 한 호흡으로 호응하는 자리.

1976년 여름부터 시작된 결

영가회의 뿌리는 — 1976년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류혁인이 안동 출향 인사들에게 하나씩 연락을 돌리기 시작했다는 결. "고향을 위해 기어이 모임을 만들자" — 당시 마흔을 갓 넘긴, 서울에 자리를 잡은 안동 사람들이었다는 결.

정치·경제·사회·문화 각계에서 이름을 내고 있었지만 — 고향과의 끈을 놓지 않은 이들이었다는 결.

장원석 회원의 〈잉태·출산·유아기〉(/archive/geul/geul-ingtae-yangchanseok) 에서 정리된 4차에 걸친 준비 모임:

  1. 1976년 9월 12일 — 김명회·이상두·유수석 첫 만남
  2. 1976년 10월 14일 12시 — 종로 견지동 (회원 자격·회의 명칭 6가지 후보 제시)
  3. 1976년 12월 10일 — 종로 견지동 회방가 회담실 (〈영가회〉라는 이름을 만장으로 결정)
  4. 1977년 2월 18일 — 임원 결정, 창립총회 1977년 3월 결정

1977년 3월 25일 금요일 저녁, 인사동 남강(南崗) 다실의 일곱 분

"1977년 3월 25일 금요일 저녁, 인사동의 한 다실(茶室) 남강(南崗) 에 일곱 분이 둘러앉으셨다."

일곱 분:

  • 류혁인
  • 이상두
  • 손병도
  • 석기홍
  • 이용태
  • 김해길
  • (그 외 한 분, 회의록 보완 자리)

이 자리에서 그들은 — 최종 결의했다는 결. 모임의 이름은 — 〈永嘉常綠會(영가상록회)〉. 이름 안에는 — 영가(永嘉, 안동의 옛 지명) 와 상록(常綠, 늘 푸름) 이 함께 들어 있는 결.

서울 한복판에서 안동을 한 호흡으로 모은 첫 자리 — 그 자리에 함께해 주신 분들의 이름이 — 영가회를 가장 단단히 받치고 있는 자리.

1977년 3월 26일 토요일 18:00, 덕수빌딩 창립총회

다음 날 — 1977년 3월 26일 토요일 오후 6시(18:00), 종로구 견지동 덕수빌딩 지하 1층 연회장에서 61명이 모였다는 결. 창립총회의 자리.

참석자 61명 (가나다순)

柳赫仁·李相斗·權應然·宋寶烈·孫東度·金海吉·南柱延·趙国際·金命中·金林孝·權飛仁·金能高·李三勳·權榮鳥·南時鎬·金大民·權東斗·石萬国·金村乙·金中德·權成洙·金鎮恩·權永宗·金性化·李相五·金浩吉·金牢吾·金牢德·柳福基·李用泰·張三萬·權志洙·金舟英·姜碩鏞·徐昌煥·權妹·金鼎洙·權永鼎·李龍允·金永燁·連東珠·金妹久·權判鎬·金東鎬·權野旭·千鼎石·權五烈·孫洪均·李昌大·趙輝家·南起鈍·李萬周·金 源·柳東柱·柳寒罫·金昌頽·趙樞基·金永世·李華秀·尹政模 등 61명

(상세 회의 진행·의결사항·임원 선임 — /archive/saram/1dae-kim-haegil)

〈영가상록회 → 영가회〉 이름의 변천

초창기에는 — **영가회와 상록회의 합성어인 〈永嘉常綠會〉**라 불렀으나, 후일 — 〈영가회(永嘉會)〉로 개칭된 결.

이 자리에 대한 자세한 자취는 — 별도 글 〈영가상록회에서 영가회로 — 이름의 변천〉(/archive/yeongi/ireum-byeoncheon) 에서 마주하실 수 있습니다.

강민창 회원이 짚어 두신 더 깊은 뿌리

강민창 회원의 〈永嘉會 40年史에 남기고 싶은 말〉(/archive/geul/geul-nameun-mal-gangminchang) 에서 — 영가회의 뿌리가 1977년보다 5년 더 앞선 1972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증언:

"본회의 약력은 1972년 4월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 청와대 정보비서관·민정수석 등 정부 비서관들과 함께, 강 회원이 연락간사 역할을 맡아 매월 1회 오찬을 겸해 고향 안동에 대한 소식을 듣는 〈永嘉회담〉을 운영한 것이 시발이었습니다."

1972년 청와대 비서실의 〈永嘉회담〉이라는 결이 다섯 해 동안 이어진 끝에 — 1977년 인사동 남강·덕수빌딩 창립총회라는 한 자리로 단정하게 모인 풍경.

글의 마지막 — 영가회의 한 문장

"영가회는 향토 안동을 사랑하고 향토문화를 기리면서, 안동인으로서 긍지를 되살리는 유정의 모임입니다."

이 한 문장이 — 이후 45년간 영가회를 지탱한 한 결.

편집실의 정리

이 글이 영가회에 남기는 자리:

  • 두 호흡의 첫 결. 1977년 3월 25일 인사동 남강의 일곱 분의 결과 다음 날 3월 26일 덕수빌딩 창립총회 61명의 결 — 두 호흡이 한 자리에 단정하게 자리한 모습.

  • 〈永嘉常綠會〉 라는 이름의 자리. 영가(永嘉, 안동의 옛 지명) 와 상록(常綠, 늘 푸름) 이 한 자리에 만난 결의 첫 자리. 후일 〈영가회〉 로 개칭된 결의 뿌리.

  • 1972년 청와대 〈永嘉회담〉 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더 깊은 뿌리. 강민창 회원의 증언으로 — 영가회가 1977년의 한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1972년의 매월 오찬의 결로까지 가닿는 자리.

출처: 《영가회 40년사》 26~31쪽 (제2편 〈역대회장의 약사〉 — 제1대 김해길 회장) + 회원 기고문 〈잉태·출산·유아기〉(장원석)·〈영가회 40년사에 남기고 싶은 말〉(강민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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