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 안내 — 이 글은 김원(金 원) 회원께서 《영가회 40년사》(345~347쪽) 에 직접 기고하신 글을 편집실이 한 호흡으로 정리한 자리입니다. 김 회원은 전 서울시립대학교 부총장을 이어 오신 학자로, 1977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이상두(안중2년 선배) 형의 권유로 영가회에 처음 입회한 호흡으로부터 — 한국전쟁 직후 안동고등 초창기 시절 만난 두 은사 권상철·김석헌 선생을 한 글에 단정하게 갈무리하신 자리입니다.

1977년, 영가회 입회의 자리

영가회 40년을 회고해 보니, 아주 소중한 두 분 은사와의 만남이 생각난다 — 글의 첫 결입니다.

"그것이 아마도 1977년 즈음으로 기억된다. 당시 서울시립대학교에 잠시 근무하다 작은한 안동의 재사 이상두(안중2년 선배) 형이 내 연구실에 찾아와 지역에 영가회(永嘉會) 모임이 있으니 가자는 것이다."

김 회원께서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온 지 2년밖에 되지 않아 매사가 서울 고조심해야였던 때, 마침 그곳 고향 모임에 나가면 다 알고 지내는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는 이교수의 말이 싫지가 않았다는 결. "가서 보니 정말 그랬다."

영가회 초기, 40대 후반의 사람들

해방되고 6년째 안동중학·안동농림·안동사범에 다니던 내노라하던 재 학 다사가 모인 영가회는 — 작 고향의 중학교 동창회 같았다는 결. 전후 어려웠던 시절에 서울로 와 20여년간 남게 나갔다도 사회생활에 충실하다 보니 서로 만나질 못했는데, 이게는 모두가 40대 후반쯤 되었으니 앞도 돌아보고 뒤도 돌아보게 된 나이.

그렇게 함께 모이렇으면 만감의 이름이 없고 곧 시작짹적인 안동들날 갈았다는 결. 안동건고등이와 마지가 없다 뿐이지 무대와 고세 편지지 못한 안동사부리가 천지을 올라면서 — 오랫만에 고향에 온 듯해 편안했다는 결. 장내 분위기는 금세 달아올랐다는 결. 모두가 우리 사회의 중심 자도사들로 성장했다는 결. 민준의 매를 맺고 얼굴에 가뿐가가 같도는 충후한 모습이 믿음직스러웠다는 결.

영가회의 비결, 정치색 배제

그런 분위기에 어울리어 나는 그 모임이 기다려졌다는 결. 그곳에 가면 인본계·법조계·재계·학계·중앙 각부서의 실권자들을 모두 만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위순상문 수가 있었다는 결.

나는 초기에 영가회식會誌)을 낼 때 권회실 총무를 도와은 일도 있고, 합고도 빳으게 모임의 진평도 많이 본 적 있다는 결. 나름대로 애착을 갖고 있었다는 결.

"이 모임의 취지가 정치색을 매혜하고 순 친목 모임으로 출발을 했기에 — 그렇게 잡을 한아디 없이 화이애애하게 이어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영가회만은 안동 상아들이 후손이라 두서 그런지 한세기를 지래도록 잘 수할 수 있었다는 결. 그 비결은 별 게 아니라는 자리.

두 회장의 결

누구라 해도 그 뒷면에는 장원석(안동사범) 회장의 슬은 공로가 크다는 결. 그는 발써 그 때 사회적 지위와 재력을 두루 가추고 있어서 영가회 산하액을 하기에 적격이었고, 그 모든 뒷마라리를 마다하지 않았던 머슴 역할을 잘 해주었다는 결.

두 번째 공로자는 — 역시 얼마 전에 작고한 김해길 회장(안동농림) 을 들지 않을 수 없다는 결. 그는 어려웠던 초기에 기초를 단단히 다져 놓았다는 결. 어느 날 김 회원이 좀 싶지운 질문을 던졌다는 결 — "영가회의 임기가 2년에 연임을 할 수 있지만 권홍실비더라는데, 20년 동안이나 장기 집권을 할 수 있었던 비결이 뭐냐" 고 물었더니, 그는 웃으면서 서슴없이 말했다는 결:

"위이 빠라, 나처럼 무색 무취한 사람 어디 있나, 옥심이 없으니 사람들이 나를 무관하게 놓아 줘 자리에 앉히는 게 아니겠어?"

김 회원의 평: 그는 소문난 호인이다. 김호길(포항공대 총장)·김명일(한동대 총장) 두 박사 아우들을 두고지도 속결 말도 전혀 빠지지 않는 소탈한 분이다. 영가회 가야는 적격인 분이라는 결. 오직 친목이 영가회를 오래 묶어 놓을 수가 있었던 아교없던 셈이다.

두 은사, 권상철과 김석헌 선생

영가회 모임에서 김 회원이 잊을 수 없는 두 분의 은사와의 만남 추억:

"한국동란 때 안동고등 초대 교장이었던 권상철 선생김석헌 선생과의 만남이다. 두 분은 영가회 고문으로 계셨다."

권상철 선생 — 초대 교장의 결

종학 학자가 3,3·이로 분리되어 갓 태어난 안동고등학교는 — 교사가 없었다는 결. 권 교장님은 짚도 정도 없는 마음 단 일 허위 논문에 더울 알고 손을 진고 나오시서 인사천 학생들과 다 함께 진흙벽을 짜고 짚을 얹어 지붕을 일어 가교사를 지으셨다는 결. 그 덕에 — 전시 중에도 우리들은 추위와 비를 피해 공부를 할 수 있었다는 결.

김석헌 선생 — 워즈워스의 결

김석현 선생은 서울대 국문과를 갓 나오셨서 잔정중이라 영어를 가르치셨는데 — 그 영창도 대단하셨다는 결.

"나는 아직도 그 분이 가르쳐 주신 영어의 워어즈워드(William Wordsworth, 1770~1850) 의 시 《초원의 빛》(Splendor in the Grass) 을 잊을 수가 없다."

그 시는 엘리아 카잔이 감독한 영화 《초원의 빛》에 나온다는 결. 전후 대학에 다녔던 세대라면 이 영화를 보지 않은 이가 없을만치 인기가 대단했었다는 결. 한마디로 멜로의 결작이다 — 김 회원.

글의 마지막 — 워즈워스의 시

영화의 두 남여 — 두 고등학교 사를 졸업했지만 부모의 반대로 헤어진다는 결. 원생은 보수가 인 아버지의 뜻에 따라 예일대로 진학하고, 나타나는 실연으로 정신병을 앓는다는 결. 위렌 역시 첫사랑을 잊지 못해 학업에 관심을 잃고 방황한다는 결. 결국 두 사람은 다른 길로 흘러간 한 자리.

두고 두고 보아도 가슴 아픈 라스트신에 워어즈워드의 시 《초원의 빛》이 자막으로 나온다. 한번 읽어 보자.

한때엔 그리도 찬란한 빛이었건… 이제는 속절없이 사라져 가는, 돌아갈 베이 없는…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우리 서러워하지 말고, 뒤에 남아 굳세리라. 존재의 영원함을, 티없이 가슴에 풍고, 인간의 고뇌를, 사색으로 달래며, 죽음도 안경에 잡하는 명철…

— 한 학자의 회고문이 워즈워스의 시 한 호흡으로 단정하게 닫히는 자리.

편집실의 정리

이 글이 영가회에 남기는 자리:

  • 영가회 초기 입회 결의 단정한 증언. 1977년 영가회 창립 직후을 한 회원의 시선으로 — "40대 후반의 안동중학·안동농림·안동사범 출신들이 한 자리에 모인 모습"이라는 한 호흡으로 짚어 두신 자리. 김 회원이 미국에서 박사를 마치고 갓 돌아와 이상두 선배의 권유로 입회한 자리.

  • 영가회 결의 비결에 대한 한 학자의 통찰. "정치색을 배제하고 순 친목 모임으로 출발했기에 한 세기를 지내도록 잘 살 수 있었다" 는 한 호흡 — 영가회가 한 모임로 한 호도 흐트러지지 않은 이유를 학자의 시선으로 단정하게 짚어 두신 자리. 김해길 1대 회장(/archive/saram/1dae-kim-haegil)의 "무색 무취" 결의 한 답변도 함께.

  • 한 안동인의 결 속에 함께 자리 잡은 안동고등 초대 교장 권상철·국어 선생 김석헌. 한국전쟁 직후 안동고등을 짧지만 단정하게 짚으신 한 자리. 진흙벽을 짜고 짚을 얹은 가교사의 결과, 워즈워스의 시 〈초원의 빛〉이 한 회원의 평생의 기억 속에 함께 살아 있는 결.

(※ 본문의 일부 한자·인명·문구 등 OCR 인식이 불완전한 자리는 회의록·책자 원본 보완 시 다시 다듬어 두겠습니다.)

출처: 《영가회 40년사》 345~347쪽 (회원 기고 — 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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