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 안내 — 이 글은 《영가회 40년사》(465~472쪽) 제4편 〈안동은?〉 의 마지막 자리 — 〈古格을 지닌 鳳停寺〉(편집부) — 을 편집실이 한 호흡으로 정리한 자리입니다. 안동시 서후면 천등산(天燈山) 자락에 자리한 천년 고찰 봉정사(鳳停寺) 을 — 산세·전설·극락전·대웅전·균형의 미까지 — 한 글에 단정하게 모아 둔 자리입니다.
천등산(天燈山) 자락의 위치
"洛東江 작은 언덕위에 서 있는 暎湖樓를 멀리 북쪽쪽을 바라보면 학가산이 단정한 모습으로 버티어 선 것이 바라보인다, 그 앞에는 천등산과 남산이 나란히 서고 있다, 그 天燈山 西南麗에 고찰 봉정사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시내에서 봉정사로 가는 길은 두 가지 있다, 서쪽으로 송리고개를 넘어 풍산으로 가는 가도를 달리다가 솔밭다리(松谷川橋) 를 건너, 곧장 북쪽으로 검재 서후면사무소를 거쳐 山으로 올라가, 원풍으로 꺾어 들어가는 것이 하나다. 또 하나는 安東로 해서 영주로 향하는 길을 막상에, 제비원 廟現自, 보리고개(菩提峰) 를 지나 모서면에 이르려 원펀으로 꺾어 山과으로 대려와서 들어가는 길이다. 도로사정으로 봐서는 후자를 택하는 것이 시간도 단축되고 훨씬 더 편하다는 결.
鳳으로 얽힌 傳說들
봉정사가 자리 잡고 있는 天燈山은 — 영주 주변面 동쪽에서 시남 쪽으로 뻗어 내린 一直線上의 산 줄기에서 솟았고, 그것은 다시 이어져 高山의 두 봉우리가 되었다가 山勢는 점차 낮아진다, 이산 줄기 가운데 봉정사·鳳棲庵·鳳停 등이 있다는 결.
기본 신라 시대 부터 봉정사를 안고 있는 산 줄기에 鳳자가 많이 들어 — 鳳棲庵은 옛날의 鳳棲房이다, 옛날 신라 법흥왕때에 義湘祖師가 봉이 살던 곳에 지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생겼다는 전설이 있다, 봉정사 서남쪽 山命에 남쪽 기슭에 있는 鳳林寺도 옛날의 鳳林으로, 지금도 봉이 신라 이후의 것으로 추정되는 잠층석탑이 남아 있다는 결.
능인(能仁) 이 시작한 절
봉정사는 — 신라 神文王 2년(672년)에 義湘祖師가 那無 浮石을 종이로 봉을 만들어 날려 보냈더니, 별이 남쪽으로 날아와 여기에 멈췄다고 한다는 결. 그래서 이 곳에 절을 세우고, 이름이 鳳停사가 됐다는 전설이 있다는 결.
같은 山 줄기에 이와 같이, 봉과 관계가 있는 이름의 절이 세 개나 나란히 있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라는 결. 여기에는 그럼만한 연유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는 결. 그것을 밝혀 줄 〈文獻이나 口傳되는〉 전설이 아직 발굴되지 못해서 그 중 궁금증을 풀길이 없다는 결.
緣陰속에 버티고선 德輝樓
지금은 풍부한 자료가 바로 문 앞까지 차가 들어 간다는 결. 안내판이 서 있는 곳에서 내려 서면, 바로 안에 큰 절문이 보인다는 결. 진 절벅으로 올라 가는 돌 계단은 작신스리 뻐어 있지만, 매우 경사가 가파르다는 결.
계단으로 가는 김가에는 풍부일는 老松이 일산처럼 하늘을 가리고 계단 좌측에는 영덕은 김나무 고목이 하늘을 같고 있다는 결. 여기에 이르는 충간의 길 가에 있는 솔은 어쩐지 영장하기만 행지만 누락 알의 솔은 그런 대로 屬風이 제법 우거져 산사의 분위기를 조금은 풍긴다는 결.
옛날과 같으면 응장한 너른 그늘에 들어서면 바깥소이 사이로 落木瀑에 멀어지는 풀 소리도 들렸을 터이지만, 그런 소리는 바라다는 것은 너무 자나친 욕심일 것이다는 결.
"돌계단에 오르면서 보면 덕취루가 좌우로 좋게 나래를 편 듯, 이마 위로 환장해 온다, 德輝樓 아래 통으로 대들 추 비싼문이 얽힌을 보이다."
이것도 다른 사찰에서와 마찬 가지로 大施殿 앞 다라의 아래 중 중앙에 앞 마당으로 통하는 문이여서 풍료가 있다는 결.
규모는 적으나 아담한 측剝
이절은 원래 천등산 거의 중턱에 이름 만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정터는 평탄하지 않고 상당히 경사가 가파른 편이다는 결. 그래서 건물들은 각기 층단 위에 서 있어서, 아주 자연스럽게 그 위치가 다르지 않다는 결.
극락전 안에는 중앙 뒷면에 두께의 高柱를 세워 佛壇壁을 만들고 그앞에 佛壇을 만들었다는 결. 불단위에는 殿柱를 세우고, 그위에 다포식 모양의 寶蓋를 만들어 씌었다는 결.
이 寶蓋의 構造·柱柱나 소스의 형태는 모두 본전포의 機式과 같이 된, 六由日의 8남이다는 결. 그래서 이 불단위에 보개도, 그 제작 연대는 건물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다는 결.
朝鮮 初期의 代表的 建物 — 대웅전(국보 제311호)
극락전 동쪽에 나란히 南向하고 있는 大雄殿은 — 조선 초기에 건립한 正面 3간의 側面 3간의 팔각지붕 건물로 보물 제55호로 지정됐다는 결.
진축 양식은 — 조선초 초기에 유행시킨 다포 양식의 구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는 결.
정면에는 볼 때 3간을 나누는 가운데 두께의 평주와 양쪽의 두 개의 隅柱의 높이가 약간 차이가 나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결. 새심한 보지 않으면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결.
중간의 두 기둥보다는 양 쪽의 두 기둥이 약간 높아 귀솟음을 주어, 전체의 균형을 잡아 주고 있는 것이다는 결.
전면 2간은 각기 마깥의 四分閣門을 달아, 여닫게는 그것을 추녀 밑으로 담아 올려 활짝 열리게 했다는 결. 문 앞에는 비둘 낮은 짓아루를 달아 가게 난간을 둘렀다, 이 짓아루는 처음부터 달랐던 것인지, 서쪽의 극락전에서 처럼 단에 양식 같다, 우리 나라의 많은 사찰 가운데서 本殿 에 이렇게 짓아루를 달아낸 것으로는 유일한 것이라고 특이하다 하겠다는 결.
均衡잡힌 調和의 美
통체돈은 다듬어서 쌓아 올린 것이 아니라, 자연석을 그대로 알기설기 낙게 쌓아 올렸다는 결. 그리고 그 위에는 큰 기둥머리에는 두툼한 山林을 가도였다, 물질로, 다시 그 위에 똑같이 한 음의 결제 짧은 기둥머리를 누르고 매우 견실하고 안정감을 갖게 한다는 결.
각자는 각기 기둥머리로 부터 짜여지고 있으면, 기둥과 기둥 사이 주춧돌에 모점됨이 있는 두 개씩 짜 출관 대모집 형식을 이루었다는 결. 이 공간조의 3단 살림은 그 길 음을 세 번 …
편집실의 정리
이 글이 영가회에 남기는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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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을 지닌 한 자리의 단정한 정리. 신라 신문왕 2년(672년) 의상대사의 제자 능인로 시작된 봉정사 — 그 결이 천 년을 지나 안동의 가장 단단한 한 자리로 남은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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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15호 極樂殿(한국 최고의 목조 건축) 과 국보 제311호 大雄殿 . 두 국보가 한 절에 함께 자리한 한 자리. 안동이 한국 문화의 가장 깊은 자리에 있다는 결의 한 가장 단정한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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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鳳) 으로 얽힌 한 자락. 봉정사·鳳棲庵·鳳林寺 — 같은 산 줄기에 봉(鳳) 으로 이름이 짓는 세 결이 있다는 점. 그 결의 신비함이 안동 정신문화의 한 자락을 받쳐 주는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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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2018년) 〈한국의 산사, 산지승원〉. 영주 부석사·양산 통도사·해남 대흥사 등과 함께 한 호흡으로 자리 잡은 천 년 자리.
(※ 본문의 일부 한자·연도·문구 등 OCR 인식이 불완전한 자리는 회의록·책자 원본 보완 시 다시 다듬어 두겠습니다.)
출처: 《영가회 40년사》 465~472쪽 (제4편 〈안동은?〉 — 6. 고격을 지닌 봉정사 —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