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 안내 — 《영가회보》 8-1호(2022년 겨울호) 10면 〈영가마당〉. 안동을 한 호의 수묵으로 옮겨 오신 김대원 화백의 글. 대표작 〈토계의 고가와 들녘〉이 함께 게재된 자리.
"낙엽은 귀근(歸根)이라 하지 않았는가"
내가 굳이 고지식한 한국화를 고집하는 것은 안동에 흩어진 옛 문화유산들을 수묵으로 그리기 위해서이다.
안동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유학하면서 안동의 정서에 매료되어 서양화에서 수묵화로 화풍을 바꾼 내력 또한 이와 같은 맥락이다. 안동에 산재한 문화유산들의 풍광과 정서를 표현하기에 적절한 매체가 한국화라는 점을 깨달았고, 수묵이 이런 정서를 표현해 내는 효과를 그려내는 데 적합하기 때문이다.
내 작품 세계에서 한옥은 중요한 요소이다. 허물어지는 옛 기와집은 익숙하면서도 매력적인 소재이다. 풍경이나 한옥을 통해 자연의 오묘한 원리를 전달하는 동시에 고가를 통해서는 선인들의 흔적을 되새김질한다. 이러한 기와집과 허물어지는 담장에서 느낄 수 있는 쇠락함에 매료되었다.
"그림이란 — 시간의 힘에 의해 사라져버리는 것들을 화면에 환생시키는 일"
고목과 퇴락한 한옥, 계절의 노인인 늦가을과 겨울의 정취, 오래되고 낡은 사물들의 피부에 얼룩진 흔적과 상처들이 바로 그러한 대상들이다. 유한한 인간 육신의 삶과 시간을 훌쩍 넘어선 사물들에 대해 보내는 경이로움과 애잔한 시선들이 화가에 의해 그려지고 감상된다. 이런 경관들은 머지않아 자취를 감추고 스러져 버릴 안타까운 존재들이기도 하다.
그림이란 어쩌면 지상에 존재하는 사물이 시간의 힘에 의해 사라져 버리는 것들을 안타깝게 여겨서 화면에 환생시키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고색창연한 사물을 바라보는 마음은 슬플 수도 있다. 이런 슬픔이 연민으로 변하여 연민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새로운 눈으로 다시 보게 한다. 그것들은 별개의 세계가 아니라 끊임없는 순환의 고리 안에 들어 있다. 사실 동양예술은 노회함과 연륜을 통해 세월의 무게를 존중하는 문화이다. 그리고 자기 시간을 보내는 문화이기도 하다.
한국인에게는 시간과 세월의 무게가 무겁게 느껴지는 대상에 대한 독특한 미감과 정서가 깃들어 있다. 이는 언어로 명확하게 설명하기 어렵다. 하지만 심정적으로 큰 감동과 울림을 전해 준다.
대표작 〈토계의 고가와 들녁〉 — 134×490cm, 화선지에 수묵, 1997
지금의 이육사문학관에서 도산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본 고가와 강 건너 왕모산성 자락을 그린 것이다. 기우뚱하게 스러질 듯한 기와집에서 고색창연함을 표현하였고, 일률적이고 반복적인 필을 전체 화면에 구사함으로써 거칠고 황량한 인상을 주었다. 동시에 고른 필치로 온화한 표면 질감을 느끼게 하였다. 지금은 기와집 앞쪽에 자동차 길이 생겨서 이러한 운치가 사라졌다.
영가회 회원에게 드리는 한 마디
이처럼 나에게 귀향은 목적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런 작업을 행하는 데는 애로사항 또한 적지 않다. 안동은 지리적으로 매우 넓어서 서울의 두 배 반이라 하는 만큼 문화유산과 동떨어진 소외지역도 많이 있다. 내가 태어나서 자란 남선면 일대는 안동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으로, 번듯한 종가나 기와집도 없는 지역이다. 주민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축사와 아스콘공장 건립을 강행하는 시의 행정에 원망하며 분노하고 있다. 그런데도 남선면 신석1리는 1~2년 사이에 외지에서 새로 집을 지어서 이주해 온 세대가 10가구가 넘는다.
영가회는 모두 안동을 떠나온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렇다고 여생을 객지에서 살아야 할 이유는 없다. '낙엽은 귀근(歸根)'이라 하지 않았는가. 귀소본능이란 말도 있지 않는가!
고향에 돌아와 고향을 위해 봉사하다 가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며 바람직한 일이리라. 고향이 나를 반겨줄까? 고향사람들이 나를 받들어 줄까? 따지지 말자. 이제까지 객지에서 고향을 잊고, 등한시해 온 자신을 반성하고, 이제부터라도 여생을 고향을 위해 일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돌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 김대원 / 김대원 미술관 대표·前 경기대 교수
편집실의 정리
이 한 호의 〈영가마당〉이 영가회에 남기는 자리:
- 〈토계의 고가와 들녁〉 — 김대원 화백의 대표작이 한 호에 갈무리된 자리 (134×490cm, 화선지에 수묵, 1997)
- 김휘동 전 안동시장의 〈귀천(歸川)〉과 한 호에서 나란히 흐르는 자리 — 〈고향으로 돌아오는 귀천〉(7면)·〈영가마당 수묵으로 그리는 안동〉(10면)의 한 결
- '낙엽은 귀근(歸根)' — 영가회의 한 결을 가장 단정하게 말해 두는 한 자리
영가회의 화백이 한 호에 다시 풀어 둔 안동 — 한 결의 수묵.
(참고: 김대원 화백 관련 글 — 〈김대원 화백 — 안동을 수묵으로 옮긴 한 사람〉)
출처: 《영가회보》 8-1호 (2022년 겨울호) 10면 〈영가마당 — 수묵으로 그리는 안동 / 김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