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전의 시대 — 3대·4대 회장과 1990년대

영가회의 황금기, 회원 100명을 넘기다

2026年 05月 10日글 · 편집실

3대 류혁인 회장 — 도약의 기반

1988년 류혁인 회장이 취임했을 때, 영가회는 이미 안정된 조직이었다. 그러나 그는 안정에 안주하지 않았다. 그의 임기 동안 영가회는 양적 성장과 질적 심화를 동시에 이루었다. 회원 가입 문턱을 낮추면서도 안동 출신이라는 정체성을 명확히 유지하는 균형을 잡았다. 회원들 사이에 서로를 소개하고 교류를 촉진하는 분위기가 생겨났고, 모임 자리에서 단순한 친목을 넘어 회원 간의 실질적인 도움이 오가기 시작했다. 류혁인 회장 재임 말기인 1991년, 영가회는 마침내 회지 《영가문화》를 창간했다. 그 자체로 영가회가 단순한 향우회를 넘어 문화 단체로 나아가겠다는 선언이었다.

《영가문화》 창간의 의미

1991년 창간된 《영가문화》는 영가회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다. 회원들의 글을 모아 책으로 엮는다는 것은 조직에 기억과 기록의 문화를 뿌리내리는 일이었다. 창간호에는 안동의 역사와 문화를 조명한 글, 서울살이를 담은 회원 수필, 그리고 영가회 연혁이 실렸다. 부피는 얇았지만 그 의미는 두꺼웠다. 《영가문화》는 이후 매년 또는 격년으로 발간을 이어가며 영가회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그릇이 됐다.

4대 김남식 회장 — 100명의 시대

1994년 취임한 4대 김남식 회장의 재임기는 영가회 역사상 회원 수가 가장 빠르게 늘어난 시기다. 취임 초 70여 명이던 회원은 그의 임기 말인 2000년에 이르러 100명을 넘어섰다. 이는 단순한 숫자의 변화가 아니었다. 100명이 넘는 조직은 운영 방식부터 달라져야 했다. 소수가 서로 잘 알던 모임에서, 처음 보는 얼굴이 생기고 세대가 나뉘는 조직으로 변모한 것이다. 김남식 회장은 이 변화를 유연하게 이끌었다. 원로와 신입이 자연스럽게 섞일 수 있는 행사 형식을 고안하고, 신입 회원 환영 문화를 제도화했다. 1990년대 말, 한국 사회 전체가 IMF 외환위기로 휘청거리는 와중에도 영가회는 흔들리지 않고 모임을 이어갔다.

출처: 《영가회 40년사》 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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