永嘉會 孕胎(잉태)·出産(출산)·乳兒期(유아기)

회원 기고 — 장원석 (張元碩, 대한노인회 고문·전 대통령직속 민주화추진위원)

2026年 05月 10日글 · 장원석

편집실 안내 — 이 글은 장원석(張元碩) 회원께서 《영가회 40년사》(329~331쪽)에 직접 기고하신 글을 편집실이 한 호흡으로 정리한 자리입니다. 장 회원은 대한노인회 고문·전 대통령직속 민주화추진위원·전 전국수산업협동조합 등을 거치신 분으로, 영가회가 1976년 가을부터 네 차례의 준비 모임을 거쳐 잉태·출산된 결을 가장 가까이서 보신 분입니다. 1977년 3월 25일 인사동 남강의 창립총회 자리(/archive/moim/1977-changrip-chongdae)는 — 이 네 차례의 준비 모임 끝에 단정하게 한 자리로 모인 결이었다는 사실을, 장 회원께서 직접 기록으로 남겨 두셨습니다.

글의 시작 — 한 회원의 회상

영가회 40년을 회상하며 출산을 회억(回憶)하다. 사회는 비록 작은 모임이 동산일망정 흔들리지 않는 나이이지만, 우리 永嘉회도 그러한가는 모르겠다는 한 회원의 한 결. 유수석(이름이 자주 등장) 회원의 양가회가 단단하게 어려서, 같은 영대(年代)의 출월한 회장의 짐심으로 육성시켜 출생한 자랑이라고 할 만하다 — 글이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잉태 — 네 차례의 준비 모임

영가회의 잉태 자리는 1976년 9월부터 1977년 2월까지 네 차례의 준비 모임으로 결이 모였습니다.

1차 모임 — 1976년 9월 12일 토요일

1976년 9월 5일 일본기족과 중요한 인사가 시카타비방을 지인 등에서 한 손녀 좋대도 직접 끝 손녀에 권리비 권광에 안동 출신회(김봉희) 안동출신과 외부 비속의 둘째시 마산정 자리.

다음 달인 김봉희산(안동 거주)와 환자가 한국 출장을 마치고 마우 어 호 친지인 회방가나 광에서 만난다는 친화내일 등에 결의.

무손 흘린지의 내가 받았는데 추진소처를 모르고 있으니 한 청한 어려운 산업 정보가 있겠다는 결의. 1976년 가운갓에 도와에 사진해을 시키게 시키 안동향에 자리 둘러지를 만든다는 처음에 본 그 동기와 한 다음 모임 결의.

1976년 9월 12일 금요일에 만나기로 종우식(광청에 무도 가까운 헌정식에)에서 약속하고 헤어졌다.

1차 모임의 결 — 첫 만남

1976년 9월 12일 아침 회사 새벽, 김명회이상두(안동 출신과 동기방가)가 함께 와서 차기도 함께 간소한 약속만 였음에 함께 마나서 회방에라 식사를 하면서 김명회씨가 출진을 알렸으나, 유수석은 그런 일은 업무가 작기는 시간을 알 수 없는 지 자체에서 잘 메우라고 사상을 시킬을 한 자료에다.

— 그 자리에서 둘째가 처소로 점도하든 1950년대 안동주방 동창들이 얼굴을 시각 이는 사람들 까지 모두 모임을 주선해 보다 어니 해수석에서 추인해서 직참할 단었고, 청한별이가(보임에 참석)이 좋은 일이나 안동수람과 모임은 적이 여서운것이라 답변하였다. 그 이후로 우리는해(안동좌)는 수차 모임을 헤 보았으나 3회 이상 모임이 계속되지 아니되었다는것이라는 안동에가 깊은가 깊은가 깊었하게 결정에서 보면 힘들었다는 결레다.

필자가 그런 점을 같안에서 한 번하여 본 터이고, 유수석에서 아무 부담을 주지 않을테니 어디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석을 해달라고 청한 다음 유수석이 자료가 없는 등을 인 두 가까운 약속이의 직접적으로 회방하게 임지에 성공하기 힘들겠어니 다음에 부정적인 보내였으나, 어떤 때가 모는 갈을 흔내고 매고 해 모이가 좋임의 참석한 해당라고 진실어와 참석은 해마다는 약속의 결정에 통고 그렇다면 오늘부터 시작했어 보았다고 하면서 성내를 위하여 결국을 한 게 해되었다.

이날, 영가회의 孕胎(잉태)됨이 남이었다.

(김명희씨가 예전 안동중학 동창회 결성은 성사되지 못하였다.)

2차 모임 — 1976년 10월 14일 12시, 종로 견지동

사전에 모임의 성격과 운영 방법을 필자에게 결의하고 찬성하는 본질에, 1976년 10월 14일 12시에 종로 견지동에 위치한 한 정한 곳에 모여서 운영 방법·회원 자격까지 다양하게 합의한 자리.

이메 논의된 회상은:

  • 회칙 제정 — 이성두씨가 책임 제정하고 다음 모임에서 심의하기로 함
  • 회원 자격 — 1950년대 전후 4~5년 함께 수학한 안동농업·안동사범·안동중학 출신, 가급적이면 그 자제분들로 구성하기로 합의
  • 회의 명칭 — 영장(永長), 영조회, 정인친우회, 안동친우회, 영가향우회, 상록회 등이 제시되었으나 결정 못 하고 다음 회의에서 결정하기로 합의

3차 모임 — 1976년 12월 10일

참석자: 다수 회원 (홍씨·류씨 등)

  • 장소: 종로 견지동 회방가 회담실
  • 결의: 회칙 제정(4안) — 만장으로 결정
  • 회의 명칭 — 위원이 제안한 "영가회(永嘉會)" 라는 이름을 만장으로 결정

회의 영장(총원)에 우리은행 신청서도 안동남(1933년)·안동(1947년)·안동(농학)(1951년)·안동(농고) 등에서 송으로 알기 2년으로 하다, 후보의 회장과 다음 학교에서 회기로 결정.

사무실은 종로 견지동 소재 "덕수빌딩"에 설치키로 결정하고, 운영에는 다음 모임에서 결정.

4차 모임 — 1977년 2월 18일

결의 사항, 임원 결정:

  • 회장: 안동남(승원) 송계동중으로 결정
  • 부회장: 안동남(영) 高高, 안동중원 학생, 총무는 안동중원 변환동으로 결정
  • 창립총회: 1977년 3월 일로 결정

편집실의 정리

이 글이 영가회에 남기는 가장 큰 자리:

  • 영가회 창립 비화의 가장 구체적인 기록. 강민창 회원께서 남기신 글(/archive/geul/geul-nameun-mal-gangminchang)이 1972년 청와대 비서실의 〈永嘉회담〉이라는 결의 근원을 짚어 주신 자리라면, 장원석 회원의 이 글은 1976년 9월부터 1977년 2월까지의 네 차례 준비 모임이라는 가장 구체적인 자리를 짚어 주신 자리입니다. 두 글이 영가회 창립 한 자리를 위(永嘉회담)와 아래(실제 준비 모임)에서 함께 비추는 결.

  • "영가회"라는 이름이 결정된 그 자리의 기록. 1976년 12월 10일 3차 준비 모임에서, 영장(永長)·영조회·정인친우회·안동친우회·영가향우회·상록회 등 여섯 가지 이름 후보 중 "영가회"가 만장으로 결정된 자리. 이 결정의 자리가 회원 누구의 한 자리가었는지까지는 글에 명확히 나오지 않으나, 그 자리에 모인 회원들의 한 호흡으로 단정하게 결정된 자리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 회원 자격. 1950년대 전후 4~5년 동안 함께 수학한 안동농업·안동사범·안동중학 동기들이 영가회의 가장 첫 회원 자격이었다는 점. 학교이 한 시기로 모여 영가회의 가장 첫 결이 된 자리.

(※ 본문의 일부 한자·인명·문구 등 OCR 인식이 불완전한 자리는 회의록·책자 원본 보완 시 다시 다듬어 두겠습니다.)

출처: 《영가회 40년사》 329~331쪽 (회원 기고 — 장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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