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립 후의 혼란, 그리고 수습
1977년 창립 이후 영가회는 초기 흥분이 가라앉으면서 적지 않은 혼란을 겪었다. 창립 회원들의 열기는 높았으나 모임을 지속하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정기 모임 장소를 구하는 일, 회비를 거두는 일, 연락망을 유지하는 일 — 지금은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들이 그 시절에는 하나하나가 숙제였다. 1981년, 이상두 회장이 취임하면서 영가회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그는 감정보다 실무를 앞세운 사람이었다. 취임 첫 해에 회칙을 전면 정비하고, 회원 명부를 체계적으로 갱신했다. 모임 날짜를 연 2회로 고정하고, 회비 납부 방식을 명문화했다. 작은 일처럼 보이지만, 이러한 기반이 갖춰지지 않으면 어떤 조직도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이상두 회장은 잘 알고 있었다.
회원 배가 운동과 네트워크 구축
이상두 회장 재임기의 가장 큰 성과는 회원 수의 안정적 증가다. 그는 취임 초부터 "서울에 있는 안동 사람을 한 명도 빠짐없이 찾아내자"는 목표를 내걸었다. 회원 한 명이 안동 출신 지인 한 명을 데려오는 방식으로 회원 배가 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서울에서 활동하는 안동 출신 의사, 교수, 사업가들이 차례차례 영가회에 합류했다. 서울 각지에 흩어진 회원들이 지역별 소모임을 꾸려 평소 소통을 이어가는 방식도 이 시기에 자리를 잡았다. 강남, 종로, 마포 등 회원들이 많이 모여 사는 지역을 중심으로 비공식 모임이 생겨났고, 이것이 훗날 영가회 네트워크의 뼈대가 됐다.
토대를 쌓은 시대
이상두 회장이 1987년 임기를 마칠 무렵, 영가회는 창립 초기와는 다른 조직이 되어 있었다. 회원 수는 창립 당시의 두 배 가까이 늘었고, 모임은 해마다 빠지지 않고 열렸다. 그가 다듬어 놓은 회칙과 운영 방식은 이후 수십 년간 영가회의 표준으로 이어졌다. 화려한 이벤트나 기념비적 행사보다 꼼꼼한 토대 작업을 통해 조직을 살려낸 2대 회장 시대는, 지금 돌아봐도 영가회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 가운데 하나다.
출처: 《영가회 40년사》 5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