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 안내 — 이 글은 류종묵(柳鍾默) 회원께서 《영가회 40년사》(362
365쪽)에 직접 기고하신 글을 편집실이 한 호흡으로 정리한 자리입니다. 류 회원은 영가회 5대 회장(20112014)이자 풍산회사 대표회장·(주)풍국 대표이사 회장으로 결을 이어 오신 분으로, 1968년 봄 관철동의 한 자리에서 김해길(金海吉) 1대 회장과 처음 마주한 호흡으로부터 평생에 걸쳐 만나신 안동의 사람들을 한 글에 단정하게 갈무리하신 자리입니다. 영가회뿐 아니라 안동향우회·재경동창회·향우회장학재단·상악회 등 — 안동을 받치는 여러 자리에서 만나신 한 호흡. 2017년 12월에 마무리하신 글입니다.
글의 시작 — 한 안동 사람의 회상
초저녁 날씨답지않게 제법 발랄하고 금방 눈이라도 내릴 듯한 음씨네스런 늦은 오후, 삼성의료원에서 조문을 마치고 어떤 마음으로 터벅터벅 일원역을 향해 걸으면서, 안동 모임에서 만났던 잊혀가는 그리운 사람들을 향해 걸으면 생각했다 — 글이 시작되는 결입니다.
이 한 자리의 결로부터 평생에 걸쳐 만난 안동의 사람들이 한 분 한 분 떠오르시는 결.
첫 번째 결 — 이회대(李熙大) 선배, 그 따스했던 한 자리
가장 먼저 떠오르는 분이 이회대(李熙大) 선배. 그분은 소탈하고 결손하며 사명적인 성격이기에 친화력이 뛰어나고 집념이 강하여 부지런한 사람이었다는 결.
늘 안동을 생각하고 안동 사람을 만나기를 좋아하여 틈나는 대로 안동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는 결. 일찍이 정치에 꿈을 품고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뒤 외사신문, 의림신보 편집국장, 주필을 거쳐 보건행정청 식·박사 학원도 취득하여 군대, 한밤대, 대구한의대 교수로 봉직했다는 결.
두 번째 결 — 김해길(金海吉) 1대 회장과의 1968년 봄
그도 또 안동과 안동 결을 사랑했던 그가 세상을 일찍 떠나갔다고 하니, 그 누가 생각하지 않으랴.
1968년 이은 봄 관철동 대린집으로 나림을 풀라(부재배)에서 박걸리를 시켜놓고, 재경동창회의 임원회와 조직구성을 영필권하면서 나의 참여를 적극 잡유하셨다는 결. 그는 지대욱(池大旭) 선배의 사범사사·사무국장, 권준동(權鳩東) 선배의 부친의 책임으로 인하여 호기심 삼은 본주의 오기였다.
— 김해길 1대 회장(/archive/saram/1dae-kim-haegil)을 처음 만난 그 자리. 그래 늦은 본 부지론에 위치한 중국집 대화선에서 가져 안동고등학교 재경동창회를 발족시키고 초대 총무를 맡아 동창회의 기반 조성에 헌신하셨다는 자리.
그의 열정적인 동창사랑에 이끌려 그의 뒤를 이어 6년간 (나도 충무로서 미려하나마 재경동창회 초장기 성장 발전에 시간과 정성을 보탰다는 결.)
세 번째 결 — 김순임(金舜任) 선배, 안동대 의대와 유립의 표본
또한 재경에서도 우리의 안동회(永嘉會) 에서도 아무래도 김해길(金海吉) 선배와 권화실(權和室) 선배가 떠오른다는 결.
80년도 어느날 정림 멤버이신 김계헌(金啓憲) 선배의 입회권유에 따라 시민회관 커피숍에 들어서니, 초로의 영가니 풍구, 어눌한 안씨, 아주 친절해 보이는 얼굴에 일은 옷음으로 후배의 입회를 기다리던 그 분이 후일에 알게 된 김계헌 선배였다는 결. 나중에 알고 보니 정인고예서 우리 동남배 들에게 향수를 가르쳤다는 결.
그 다음 단 프레스센터 19층에서 가산성 같은 선배님들의 입회신청을 받고 카페일 마티의 살매김과 양주에 취하고 김밥으로 거우 배를 채웠던 그 밤이 따뜻해 생각난다는 결.
김해길(金海吉) 선배는 많은 안동인이 아시다시피 전형적인 안동 유립(儒林) 의 표본인 분이라고 한 호흡 단정하게 짚으십니다.
- 항상 자신을 낮추고 안동의 전형적인 어휘와 억양으로 구수하고 정답을 끌어냈다는 결.
- 언제나 어디서나 큰 형님을 뵙는 듯 반가웠던 분으로 잊혀지지 않는다는 결.
- 영가회의 창립 동기를 "안동사람이 의 알 만한 사람들은 같고 지내자" 라고 말했다는 결.
회원 자격과 회칙, 회의 목적을 얼마나 곱고 분명하게 표현하셨는가? 그러기에 유형(儒型), 특유의 차분심과 까다로움이 없는 "안동인의 모임 영가회"를 20년간 이끄셨던 결.
네 번째 결 — 안동향우회(鄕友會), 권상철(權尙喆) 교장 선생님
안동향우회(鄕友會) 하면 권상철(權尙喆) 교장 선생님이 그립다는 결. 선생님은 나의 영원한 스승이시다.
1969년 어렵은 진실 같에 향우회 초대회장을 맡아주셨다는 결. 김희정 선생과 강사장학회 (현 연성대학) 운영과 대학교육에서의 여러 중책을 받으시며 어느슬 없이 천 마이 도 안동 후배들의 그 안방 위해 청립하사 향우회 회동의 기반을 굳건히 다져주셨다는 결.
나는 선생님의 사랑하고 안동사범 학교를 포기하고 안동고등학교 초대 교장이신 선생님과 무한례 끝없이 선생님께서 사로 정통영업고등학교 전통이지에 일학에 댄을 만든 결.
향우회 창립시 선생님께서 갈 오늘이 된 나는 이사(理事)도 추천하시기에 "안동을 위해 봉사하야겠다"는 스승님의 영으로 알고 향우회에 참여하여 그때 박구일(朴久日), 3대 류송반(柳奉昌) 회장, 4대 신현수(申鉉洙) 회장, 5대 정·박(鄭·朴) 회장에 이르기까지 10년간 감사관(監事) 으로 미력이나마 향우회의 발전에 봉사했다는 결.
다섯 번째 결 — 향우회 일에서 빠지지 않는 분들
향우회의 얘기에서 빠지지 않을 분이 두 분 계신다는 결.
한 분은 2, 3대 회장 시절 3년간 사무국장을 역임하신 김창천(金昌天) 선배 시다. 또 한 분은 나와 함께 감사관(監事) 을 맡았던 이회(李慶) 선배시다. 김창천 국장은 만수의 길게 비웃고 어려운 일이나 슬프다도 아무 같이 우리들의 행동을 가르치셨고, 출세에 밝으니까 마치 우리를 형제처럼 좋아 신세하셨던 분이시다.
그러나 단지 학우들이 적은 의실과 회의 성격상의 청업회 차원으로 이어지지 못한 점은 살자도 안고서, 나 만년 경우와 마지막 안 항을 모셔어, 향우회도 성장과 정통으로 한복화한 어머어를 길어를 들지 못한 결.
여섯 번째 결 — 향우회장학재단 (鄕友奬學財團)
안동향우회장학재단(鄕友獎學財團) 에서는 수년전(2011)에 작고하신 이순호(李寧虎) 선배가 기억난다는 결. 이 선배는 한국전쟁의 흔란기에 고등군사사업과 함께 부수(府數)학생으로 일생이 명을 첨거에 펴낸 본의나, 대학교를 역임하시 일심해의 원로사 같이 노년에 여유로 결단을 내려셔서 정학생들의 권장이 됐다는 결.
대단한 끝까지 영국의 자도시간이시지의 초대 이사장을 사고 하다 줄 나면 만년의 고향사랑을 실천하기 시간이 허이까지 어려운, 내가 아쉬가 절대로 문제 보다는 그 차절의 한경을 바라보시며 "세월이 그리 길지 않으리. 일 일을 잘하셔" 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는 결.
일곱 번째 결 — 안동 9개교 친선체육대회, 그리고 상악회(上岳會)
다음은 안동 9개교 친선체육대회(九個校體育大會) 얘기를 헤야 할 것 같다는 결. 이 모임의 시작은 아마 1975년인가 싶다. 이 모임의 단초(端礼)는 70년대 두어선 모여 음으로 부담 보이며 흘러나는 선후배의 유대와 정을 나누기 위한 안동 8, 9 회교의 소박한 추구 사항이었다는 결.
- 1981년(7회)에는 농업학교와 사범학교가 참가하여 4교로 체육대회로 학대 되고
- 1990년(16회)에는 6개교(중앙고·여고 참가)로
- 1995년(21회)에는 7교로
- 1999년(25회)에는 현재처럼 9학교가 참가는 명실상부한 안동모임이 된 것이라고 보았다는 결.
40여년의 세월의 흐름은 동안 작업이 행체적인 위협한 모임 중에서, 동기를 중 많은 얼굴들이 고인이 되고, 남아 있는 우리들도 모두 황손고개를 넘나들이 인생의 깊은 멋을 짙고 있다는 결.
지난해(2016)년 제42회 대회를 주관 학교인 영문고등학교 동창회 김순거 회장이 정아고 김 면대 선배와 나림 대회의 창립세대로 특별히 초청하여 오랜만에 본대회의 성숙한 모습과 광본한 면치에 출이가 새겁을 토부터 시간을 보냈다는 결. 당초 소바다고 화복하지 못 마음이 자칭 작은 모임이 이렇게 잎동인이 친 체육대회로 성장했음으로 기쁘기 그지 없으나 규모에 결멸는 정신과 목적이 오레오래 이어지기를 진실으로 기대된다는 결.
마지막 결 — 상악회(上岳會), 1986년 창립
마지막으로 상악회(上岳會) (1986년 창립). 나는 공직자는 아니지만 상악장학회의 설립에 깨가 "자문위원"이라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기여 남 채마다 참석에 출발한 자랑스러운 안동의 선·후배들과 진로를 끌하고 마음대로의 시간이었다는 결. 상악회는 유숙히 노일동을 결합 국가, 사회 발전을 위해 왕성하게 활동하고 계시니 기뿌기 그지없다.
글의 마지막 자리 — 안동, 영원한 안식처
안동은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곳이며, 나의 영원한 안식처일 곳이다.
나의 안동사랑은 이 세상 다 하는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나는 안동사람들을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다."
— (2017년 12월)
편집실의 정리
이 글이 영가회에 남기는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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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가회 5대 회장의 직접 기고문. 류종묵 5대 회장(
/archive/saram/5dae-ryu-jongmuk)의 글은 — 회를 한 자리로 모은 한 분의 결로서, 영가회 모임의 결뿐 아니라 안동향우회·재경동창회·향우회장학재단·상악회 등 여러 자리를 한 호흡으로 이어 두신 자리. -
영가회 창립 동기에 대한 가장 단정한 증언. "안동사람이 의 알 만한 사람들은 같고 지내자" — 김해길 1대 회장께서 영가회 창립 동기를 이렇게 표현하셨다는 류 회장의 증언은, 1972년 청와대 비서실의 永嘉회담(
/archive/geul/geul-nameun-mal-gangminchang), 1976년 9월부터의 네 차례 준비 모임(/archive/geul/geul-ingtae-yangchanseok)과 함께, 영가회의 가장 첫 자리를 짚어 주는 결. -
여러 결의 한 안동인. 한 안동 사람이 영가회뿐 아니라 안동을 받치는 여러 모임들에서 평생 동안 결을 이어 온 한 자리. 영가회가 한 모임의 뿐만 머무르지 않고, 안동을 받치는 다른 결들과 단정하게 이어진 자리를 보여 주는 글입니다.
(※ 본문의 일부 인명·시기·한자 등 OCR 인식이 불완전한 자리는 회의록·책자 원본 보완 시 다시 다듬어 두겠습니다.)
출처: 《영가회 40년사》 362~365쪽 (회원 기고 — 류종묵, 2017년 12월 집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