安東人物열전 — 千炳圭와 張基鳳

회원 기고 — 천상기 (千 上 基, 경기대 호빙교수·언론학·한국신문방송편집인클럽 고문)

2026年 05月 13日글 · 천상기

편집실 안내 — 이 글은 천상기(千上基) 회원께서 《영가회 40년사》(356~361쪽) 에 직접 기고하신 글을 편집실이 한 호흡으로 정리한 자리입니다. 천 회원은 경기대 호빙교수·언론학·한국신문방송편집인클럽 고문 을 이어 오신 언론인으로, 안동이 길러낸 두 굵직한 인물 — 千炳圭(천병규, 19181992)와 張基鳳(장기풍, 19272007) — 을 한 글에 단정하게 정리해 두신 자리. 글의 결은 한국 현대사 한복판에서 안동인이 보여준 결의 한 장면을 가장 가까이서 본 언론인의 시선으로 펼쳐 두는 결입니다.

첫 번째 결 — 千炳圭(1918~1992), 5·16 직후의 재무부 장관

천병규(19181992)와 장기풍(19272007) 은 우리 안동이 낳은 대표적 인물이기다는 결.

각각 대한민국 정제계와 언론계에 큰 족적을 남긴 우리시대의 위어로 였다는 결.

천병규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안동 출신으로서 첫 장관과 국회의원을 지낸 인물이며, 천병규는 1961년 7월 22일 국세조사 1/2 뉴스를 통해 재무부 장관 임명을 알았다는 결.

곧 바로 국가재건회의로 찾아가 박정희 의장에게 인사를 한 자리.

박정희 의장과의 첫 자리

"구야에 젊은 사람을 기용해 주셔서 감격을 금할 수 없습니다. 언론을 통해서 보니 30대 젊은 장교들이 중심인 것 같은데 우국지정에 젊은 대통에 끼워주셔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 때 그는 40을 갓 넘은 젊은 나이였다는 결. 원기왕성하고 패기만만했다는 결. 그는 국가를 재건하고 회장원세 역사를 창조하는 책상감에 함께하게 되어 감격하고 있었다는 결.

"앞으로 성실성으로 회신을 다 하겠습니다만 한 가지 미리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그."

박 의장이 그것이 무엇이냐고 하기에:

"재가 솜은 좀 마신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앞으로 술로 말미암아 모험을 했는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그 점을 미리 알아주십시오" 라고 당돌한 말을 했다는 결.

박 의장은 컵을 웃으면서 "남자가 술도 마셔야 일도 할 수 있는 것이지 술 마시는 것이 흠이야 되겠느냐" 며 채 첫 대면이 웃음으로 끝났다는 결.

자유당 시절과 군정의 결

그는 원래 술을 좋아해서 자유당 시절에는 물론 4·19 때도 자주 요청을 출입했었다는 결. 그러나 5·16 이후 몇 달 동안은 재무부 장관이 된 후에도 짓을 출입을 일 차게 하지 않았다는 결.

군정 하에서 모든 실권은 국가재건회의 가 장악하고 있으니, 재무부가 일을 하자면 최고회의 재정경제위원회 와 인장한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데 — 이 위원회의 위원장 김동하 장군과 위원인 류원식 장군 의 사이가 좋지 않아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는 결. 류 장군의 부친 柳林 선생은 독립운동가로 안동 출신이며, 류원식 장군도 같은 안동 사람이다는 결.

두 번째 결 — 張基鳳(1927~2007), 이승만의 공보비서·재무부 차관

장기풍은 안동 신혜동에서 태어나 안동중을 졸업하고, 대구고보(경북고교)졸업, 일본 대륙대학을 졸업, 1942년 조선건영(한국은행)입행, 한국은행 부총재, 한국 은행감독원장, 재무부차관 역임 — 을 이어 오신 분.

광복 후 대동신문기자 시절

장기풍이 이승만 대통령을 처음 만난 것은 광복 후 대동신문 기자로 일하면서.

정보장교·중앙장 등을 종합한 취재행이면서 장기풍은 — 해방 직후의 혼란기에 외국과 그를 용감히 한 공보실 이 한 책기지를 비쳤다는 결.

6·25 피난시 부산에서의 우연한 만남

6·25전쟁 피난시 부산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우연히 만나게 된다는 결. 경남 도청 앞 길을 걷어 가다 멍든 가품을 빨아주고 있었다는 결. 이마가가 정기풍을 알아보고 — 바로 도지사 관저로 오라는 것이 아닌가? 이 대통령이 김부 김을 쓰고 있는 관저로 찾아가니, 이마가는:

"다시 서울로 입고 가서 하나, 자네 공보비서 할 줄 알지 인본기자이까ㅡㅡ"

라며 분에 사람도 없이 — 대통령 공보비서 직을 맡게 된다는 결.

미국 유학과 귀국

1856년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결혼을 한 뒤 귀국해 이 대통령을 예방했다는 결. 인사를 하자마자 박씨는 "이리 오게 저 동나봉 아래로 가게" 그러며 도내가 이루어졌다는 결.

"자네 앞으로 일 하겠나?" "아직은 별 계획이 없습니다" 라고 대답했더니, 며칠 후 갈홀기 정 부대 공보과장을 통해 서울신문 사장을 맡으라는 것이었다는 결.

그는 약 29세 미혼으로 중요한 정부기관인 서울신문의 방행이이 된 것이다는 결. 그가 29세 미혼으로 서울신문 사장에 취임한다는 뉴스는 당시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는 결.

서울신문에 채임한 기간은 1년을 넘지 못하였으니 — 서울신문의 결정 향상과 경영 정상화를 위하여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노심초사하게 노력했다는 결.

정부기관의 적자를 흑자로 전환시키게 했다는 결.

그러나 — 그의 청렴교은 언론자유주의는 너무 편파적인 정부 여당기에 오래 동 담을 수 없어 사료를 내내 보었다는 결.

편집실의 정리

이 글이 영가회에 남기는 자리:

  • 안동 인물 열전. 영가회가 — 단지 모임의 결이나 회원 한 분 한 분의 결뿐 아니라, 안동이 길러낸 인물들을 한 호흡 단정하게 정리해 두는 자리까지 가닿는다는 점. 천상기 회원의 이 글은 한국 현대사 한복판에서 안동인이 보여 준 두 결을 가장 가까이서 본 언론인의 시선으로 정리해 두신 자리.

  • 千炳圭(천병규)의 결 — 5·16 직후 40을 갓 넘은 첫 안동 출신 재무부 장관. 박정희 의장과의 첫 대면 자리에서 "술을 좀 마시는 것을 미리 알아주십시오" 라고 당돌하게 말씀하신 한 자리는 — 안동인이 한 시대의 가장 결정적인 자리에서도 한 호도 흐트러지지 않은 결을 보여 주는 자리.

  • 張基鳳(장기풍)의 결 — 6·25 피난 부산에서 이승만 대통령과의 우연한 만남으로 시작된 결. 대동신문 기자로 시작해 대통령 공보비서·서울신문 사장·한국은행 부총재·감독원장·재무부 차관까지 — 한 안동인이 한국 정치·언론·금융계에 두루 결을 펼친 한 자리.

(※ 본문의 일부 한자·인명·문구 등 OCR 인식이 불완전한 자리는 회의록·책자 원본 보완 시 다시 다듬어 두겠습니다.)

출처: 《영가회 40년사》 356~361쪽 (회원 기고 — 천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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